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치치지마 식인 사건 (문단 편집) === 내용 === || [[파일:external/ogasawara-info.jp/env_0045.jpg|width=580]] || || 치치지마(父島) || 오가사와라 제도는 일본 본토에서 남쪽으로 1,000km 떨어진 중부 [[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섬인 치치지마(父島)는 이오지마(硫黃島)에서 북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섬으로, 일본 본토와 이오지마를 연결하는 '보급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섬이었다. 당시 치치지마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육군]]은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이 이끄는 5개 보병 대대 등 약 9,000명의 병력으로 이뤄졌으며 [[일본 해군]]은 모리 쿠니조(森國造) [[소장(계급)|소장]] 휘하에 치치지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약 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5년 2월, [[이오지마 전투]]를 위해 병력을 투입하던 미군으로서는 공격로 주위의 다른 섬으로부터의 지원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치치지마였고 그를 위해 공군을 동원해 폭격을 진행했다. 이때 제51 뇌격대(VT-51)의 대원 중 한 명으로 비행기를 타고 출격한 [[조지 H. W. 부시]] 중위의 애기(愛機) '바바라'[* 당시 애인인 [[바버라 부시|바버라 피어스]](Barbara Pierce, 1925~2018)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전후 부시 중위와 결혼하여 5남 1녀를 낳았고(둘째(딸)는 3살 때 [[백혈병]]으로 [[요절]])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의 [[영부인]]이었다.]는 8,000 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중에 일본군의 대공포에 정통으로 맞아 버렸고 그 충격으로 추락했지만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부시는 간신히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해서 구명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던 일본군은 함정 두 척을 파견해 그를 쫓아왔지만 미군 비행기들이 일본군 함정이 오지 못하게 막아 버렸다. [[파일:o1ILS77.jpg]] 구조되는 부시. 부시는 그렇게 2~3시간 정도 치치지마 앞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구명정이 치치지마 쪽으로 흘러가던 중 미군 [[가토급 잠수함]] USS Finback에게 구조되었다.[* [[http://www.telegraph.co.uk/news/worldnews/asia/japan/1445167/George-Bushs-comrades-eaten-by-their-Japanese-PoW-guards.html|출혈과 구토 증세로 정신을 잃어 가면서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만약 잠수함이 부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현재 [[미국]]의 모습이 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아래 '생존자들' 문단 참조.] 다른 미군기 몇몇도 대공포에 격추되어 탑승 인원 여럿이 바다에 떨어졌는데 다른 인원들은 일본군의 포로가 된 후 전쟁 포로로 일본으로 보내진 1명을 제외하면 모두 처형되었다.[* 포로로 잡힌 9명 중 8명이 살해당했고 그 중 식인의 피해자는 5명이다. 일부 포로는 이때가 아닌 1944년에 잡혔다.] 1945년 3월 [[이오지마]]의 일본군이 전멸하자 일본 본영은 치치지마의 다치바나 장군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제109[[사단(군사)|사단]]장에 임명했으며 해군도 모리 [[제독]]을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치치지마의 두 지휘관 중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건 다치바나였고 모리와 해군부대는 사실상 육군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들 외에도 '''마토바 스에오''' 육군[[소령|소좌]]와 '''요시이 시즈오''' 해군[[대령|대좌]]가 식인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사실 한두 명의 정신이상자가 포로를 학대하거나 즉결 처형하는 경우는 당시 [[일본군]]에서 흔한 일이었다. [[병(군인)|병]]들의 처우가 열악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일본군은 [[병영부조리]], [[가혹행위]], [[구타]]가 참전군 군대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미친 군대에서 [[정신이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정신 검증이 되지 않은 인원을 마구잡이로 뽑아 왔던 데다 군부 내에서도 명령권자들이 [[난징 대학살]]처럼 점령지의 국민들을 [[비국민]]으로 취급해 대량 [[학살]]한 사건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부대의 최고 지휘관들이 관여'''해 직접 [[포로]]를 구타, 학대, [[고문]]하고 [[인육]]을 먹은 사건은 치치지마를 제외하면 달리 예가 없었다. 1947년 1월 13일 [[괌]] 재판에 제출된 마토바 스에오의 진술서에는 식인 만행이 시작된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인육 사건은 [[1945년]] [[2월 23일]]부터 25일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나는 사령부로 불려가서 다치바나 장군에게 '''[[미군]] 비행사는 스에요시 부대에서 처형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사령부에서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했습니다. 화제는 부건빌이나 [[뉴기니]]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으로 옮겨졌으며, 일부 부대에서 비축된 식량이 동나고 추가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 >나중에 카토 타케무네 대좌가 우리를 위해 연회를 베푼다고 해서 갔는데, 술과 안주가 충분하게 마련되지 못한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불만을 표시하면서 육류와 술을 준비할 무슨 방도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장군은 내게 미군의 처형에 대해 물으면서 '''인육을 얻을 수 없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육과 술 1되를 준비시켰습니다. 인육은 카토 대좌의 방에서 요리했는데,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조금씩 맛 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인육이 맛있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치바나의 명령에 따라 마토바가 처형한 미군 포로의 처리에 대해 구두 명령이 내려졌다. [[괌]] 군사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당시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1. [[대대]](大隊)는 처형된 미 해군 조종사의 인육을 먹을 것.''' >'''2. 칸무리(冠) 중위는 그 인육의 배급을 담당할 것.''' >'''3. 사카베 군의관은 처형에 입회하여 [[장기]]를 적출할 것.'''[* 여단 산하 육군 308대대의 군의관이었다. 하지만 명령과는 달리 본인 대신 하급자인 테라키 중위를 보내고 본인은 관여하지 않았으며 현장에도 없었기 때문에 기소되지 않았다.] > > 1945년 3월 9일 오전 9시 대대장 육군 소좌 마토바 스에오 > >발령 방법: 칸무리 중위와 사카베 군의관을 직접 불러 명령 하달. 다치바나 [[여단장]]에게 보고하고 호리에 [[참모]]에게도 통고함. 증언에 따르면 다치바나는 미군의 손발 고기와 내장을 먹고서 >'''"이거 맛있다. 한 접시 추가"''' 라며 '''기뻐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